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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소한 것이 매일을 풍요롭게

<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.> 본문

순간을 붙잡는 기록의 힘

<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.>

주랑아 2021. 6. 13. 23:56


요즘처럼 마음이 심란할때가 없었다.
몸은 몸대로 지쳐떨어지기 직전이고, 마음도 이미 너덜너덜해 주말 저녁이면 자투리 천 잇듯
기워야만 아침 알람에 일어날 수 있었다.
어디 하나 마음 둘 데 없어 ‘고독하구만’ 짤을 한 번씩 앨범에서 볼 정도였다.
속으로는 성대모사를 거의 똑같이 하는데, 입 밖으로 꺼내기가 민망할 뿐이다.

그런 와중에 ‘절친’으로 저장된 나의 친구가, 뜬금없이 선물을 보내왔다.
독립 서적을 읽는 독서모임을 하다가, 이 책을 읽으며 네 생각이 많이 나 보낸다면서.
독립 서적이라는 자체도 신기하지만, 이 책을 읽고 나의 어디가 생각났다는 것인지도 궁금했다.
퇴근 후 받아본 택배 속 책은,
제목부터가 웃음이 나왔다.



아버지와 여전히 속으로는 화해하지 못했으면서
전화하며, 본가에 내려가서 대화하면서는 세상 다정한 딸인척 하는 나의 모습이 일순 그려진다.
스스로 ‘너 인성 문제있어?’ 생각이 들 때면 늘 끌려나온 내 어릴 적 나의 아버지.
다 아빠 때문이야. 아빠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고, 이기적으로 만들었고, 눈치보게 만들었고, 야비하게 만들었어.
삼십대가 되면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다짐도 했다.
그래도 가끔은 투정부린다. 예전의 아빠에게.


마음이 가장 요란한 날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
이제 막 이사온 낯선 동네의, 처음 간 카페에 앉아 단숨에 읽어버렸다.
그날은 나의 아버지가 큰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.

글쓴이가 방송일을 하는 작가라는 것도
일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아프시게 된 아버지도
왜 나를 친구가 떠올렸는지, 이해할 수 있었다.
짤막짤막하나마 들어간 아버지의 일기장 속 젊은 시절은 나와 다를 게 없었고
시대만 달랐지, 고민거리는 모두가 같구나 싶었다.

아마 우리 아빠는 더 그랬겠지.
늦은 나이에 얻은 첫 딸을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지금처럼 티비에서 왕왕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고
7남매의 맏이로 평생 책임감을 갖고 살았건만 본인을 너무나도 닮은 딸내미가 나와
앞뒤가 다른 아이로 커가며, 고집은 또 얼마나 셌을 것이며 말은 드럽게도 안들었겠지.
나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시간을 11년이나 가지면서, 여전히 가끔 그 때의 아빠를 끌고와
죄인 다루듯이 했는데.

술도 좋아하고, 노래도 좋아하고, 서예도 잘하고, 머리도 명석하고 그런데도 끈기까지 있는 사람.
어쩌면 결혼을 안했으면,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더 재밌게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사람.
여전히 마음 한켠에는 화해하지 못한 아빠가 있지만 그래도,
가끔은 너무 걱정되고 가끔은 내려가서 봐야지 하는 사람.
이 딸내미도 나와 같으면서 다른, 친구 같은 아버지와 엄한 아버지는 반대말이나 다름이 없으니까,
그런 아버지를 가졌으면서도 그의 젊은 시절에 미안함과 고마움, 그리고 경외감을 동시에 보내고 있는 건
젊은 시절이 훤히 그려져서 일 것이다.
나와 정말 많이 같기에.

한편으로는 이 일이 끝난 후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.
불안과 번뇌 속에서, 늘 이 일이 나의 끝이 아닐거라며 종종거렸던 지난 2년이
스쳐지나갔다. 어쩌면 길은 익숙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.
진인사대천명이라고, 내가 열심히 쓰고 읽고 하는 동안에 바윗돌이 하나씩
내 앞으로 놓여질지도 모른다.

무엇보다 연락도 자주 못하고 코로나때문에 얼굴도 자주 못봤는데
나를 생각해준 친구한테 무척 고마웠다.
더 일찍 쓰고 싶었는데, 많이 나아지지 않는 나의 일상이 글 한 장의 여유를 주지 못했다.
다만 글쓰는 걸 잠시 멈추더라도 끊지는 않아야겠다.

이번에 본가에 내려가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부모님의 일기장을 찾아봐야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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